사실 길은 착종의 운동성을 담는다: 이은우 허내훈,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

콘노 유키

모든 길은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일반적인 상식에는 간과하기 쉬운 사실이 있다.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은 동물이 지나가는 길과 인간의 길을 비교하면서, 후자를 운동을 응집하여 시작과 끝이 담긴 이미지로 고정한다고 설명한다[1]. 동물이 지나가는 길은 인간의 길처럼 시작점과 출발점을 잇는 모양새를 갖기 힘들다. 어쩌면 자연은 끊임없는 흐름 또는 쪼개짐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길은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는 수단이다. 도로는 한 장소와 한 장소를 연결하며, 다리는 공간적인 분리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통로로 기능한다. 길이 놓이면서 하나의 점과 다른 점을 이어줄 때, 흐름은 일직선으로 통합된다.

이은우와 허내훈이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영은미술관, 2025)를 구상하게 된 계기도 우리 인간에게 익숙한 길 위에서였다. 운전 중에 우연히 목격한 ‘생태통로’가 이번 전시의 출발점이 되었다. 생태통로는 야생동물이 지나가는 용도로, 도로 위에 육교처럼 지은 인공의 길이다. 이 길을 세운 목적은 사실상 로드킬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실제로는 본래 목적을 잃어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길의 출발점과 목적지가 인간처럼 명확하지 않은 동물에게, 이 인공의 길은 애초에 적합하지 않은 물건이었다.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이 다리는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모든 길은 어딘가로 이어져 있다는 상식이 간과하는 또 다른 사실은, 운동이 응집될 때 추상적 개념만큼 쓸모가 있는—고로 없는—것도 없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다리는 분명 ‘현재’에서 출발하여 ‘미래’로 이어져 있다. 그런데 이 ‘미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자연이 울창하지만 동물들이 지나가지 않는 생태통로가 향하는 곳이 인간 또는 자연의 미래라면, 사실 이 길은 일직선보다 착종된 이미지로 나타나지 않을까. 이은우와 허내훈이 목격한 생태통로는 인간과 자연의 교차로이자 지금과 미래, 현실과 허구가 정면충돌하는 곳이었다.

미술 작품 또한 다리라면, 그것은 “잠깐, 이쪽입니다”라고 말을 걸어 발걸음을 멈춰 세운 후, 인간과 자연의 연결과 관계를 살펴보도록 해 준다.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의 출발점이 된 ‘생태통로’를 작품 소재로만 본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은우와 허내훈의 전시는 자연과 인간의 교차로로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다리가 분리를 극복하는 물건이라면, 교차로에서는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두 <파라메트릭>(2025)에서 이은우가 재료로 다루는 폴리우레탄은 부풀어 오르는 특성이 있다. 튜브에서 형태를 캐스팅하고 5초 이후로 굳는 과정에서 작가는 물성을 통제하기 어렵고, 캐스팅된 형태는 원본을 벗어난다. <프랙탈>(2025)은 멀리서 보면 대리석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물감을 여러 번 덮어 층을 만든 후 기계로 파서 깊이를 만든 이 작품에서, 관람객은 나이테처럼 드러난 시간의 겹을 공간적 깊이에 보게 된다. 이를 단순히 인공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미래로 향하는 길을 가다가, 먼 미래의 인류가 2025년의 인간을 고고학적으로 탐구할 때 조사하는 자료가 될지도 모른다. 동굴 벽화를 보고 고대인의 삶을 유추하고 연구하듯이, <프랙탈>의 패턴 속에 노출된 층을 보고 2025년에 살았던 인간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때 작품은 인공적일까, 아니면 자연에 속할까—둘 사이에서 오가는 시선이 있을 것이다. 마치 동물이 없는 생태통로를 보고 사라진 동물을 떠올리는 듯이, 미래의 인류는 우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착종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전달해 주는 <사이의 공간>(2025)에 들어가기 전에, 허내훈의 <Orbit Series> 시리즈(2025)가 걸려 있다. 위성사진을 왜곡시킨 이 작품에서 이미지는 추상적으로 변형되었다. 구체적인 대상이 달라 보인다는 점 못지않게, 이 작품에서 중요한 점은 소용돌이의 형상이다. 소용돌이는 힘의 방향이 중앙으로 빨려 들듯 그려지지만, 길을 따라가듯 시선으로 따라가면 오히려 갈 길을 잃게 된다. 전시 제목이 말하는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는 정확한 길을 같이 찾아주는 말처럼 들리는 동시에, 잘못된 길로 가도록 현혹하는 말처럼 들린다. 현기증을 일으키는 소용돌이 모양은 도로표지판과 정반대의 성격이며, 이는 <사이의 공간>에서 지나가기 쉽지 않은 구조와도 맞물린다. <사이의 공간>을 지나, 관객은 <잘못된 곳의 생존자들>(2025)을 보게 된다. 제대로 활용되어 있지 않은 생태통로에 어떤 동물이 사는지 떠올리는 듯이, 영상에는 동물이 지나가는 모습이 순간적으로 포착된다. 설치 방식은 엿보는 시선을 유도하다가도, 정면보다 시야각이 좁은 화면 앞에서—심지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우리 또한 금방 지나가 버린다. 아주 순간적으로 나타나 화면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동물들은 인간(관객)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관객인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동물에게 행복한 것일까.

생태통로의 사례처럼, 인간의 몰이해와 무관심이 야기한 결말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동물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이러한 상상은 <잘못된 곳의 생존자들>의 동물들이 AI를 활용하여 제작된 사실과 겹친다. 현실과 상관없이, 인간은 자연을 만들게 되었다. 푸른 장미의 색을 다시 벗기는 <장미 2025: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에 대하여>(2025)와 <사향>처럼, 자연물은 인간의 상상에 힘입어 상품이 되기도 한다. AI가 연구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도처에 보이는 광고에서 훨씬 익숙한 것처럼, 인간의 기술은 욕구를 충족시키고 다른 욕구를 창출한다. 향수 원료로 사용되는 사향노루의 냄새는 이제는 대중적으로 유통된다. 인간이 개발하고 상품화하고 보급하는 과정 또한 하나의 길이라면, 이 ‘유통’의 과정 역시 교차적이다. 자연에서 살다가 멸종위기를 겪는 노루, 인기를 얻어 인공적으로 개발된 향기, 고급화와 대중화가 오가는 길은 일직선이 아니다. 짐멜은 당시 생각도 못 했겠지만, 도로—특히 고속도로는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한 방향으로만 나아간다. 여기에는 방해되거나 부딪히는 요소가 제거되는데, 사실 길은 그러기만 하지 않는다. 짐멜이 말했듯이, 길은 분리와 통합의 운동성이 담기기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는 ‘미래를 향한’ 길에 인간도 동물도 서 있다면, 우리는 미술작품을 통해서 나아갈 길을 구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다. 《아마도 이쪽입니다, 고라니씨.》는 삶과 죽음, 인간과 자연, 현재와 미래, 허구와 현실이 만나는 교차로에 우리를 서도록 한다. 목적성을 내세운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는 기회, 그것은 이은우와 허내훈이 도로 위에서 생태통로를 우연히 발견한 것처럼, 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길은 분리와 통합의 운동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 역동성 안에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다시 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1] ゲオルク・ジンメル, 酒田健一(訳), 『橋と扉』, 白水社, 2020, p. 36

“In fact, paths embody the mobility of entanglements”
: Eunu Lee & Naehoon Huh, Perhaps This Way, Mr. Goral.


Konno Yuki

There is a commonly held assumption that all roads lead somewhere—but it overlooks a subtle fact. Georg Simmel, in comparing the paths animals traverse with the roads humans build, explains that the latter congeal movement into fixed images of beginning and end. An animal’s trail seldom takes the form of a line connecting a defined start and destination. Perhaps nature itself resides in perpetual flow or fragmentation. A road made by humans is a means of overcoming those constraints. A highway connects one place to another; a bridge not only surmounts spatial separation but becomes a new passage. When a path is laid down linking one point to another, the flow is integrated into a straight line.

The starting point of the exhibition Perhaps This Way, Mr. Goral—by Eunu Lee and Naehoon Huh at the younen Museum (2025)—also emerges from a human-familiar road. What they happened to see while driving was an ecoduct—a man-made wildlife crossing, built like a pedestrian bridge over a roadway. Such crossings are actually intended to prevent road-kill, but many are in fact abandoned, their original purpose lost. For animals, whose points of departure or arrival are not as clearly defined as humans’, this artificial path was never truly suited. Where does a bridge that no one walks go? The assumption that all roads lead somewhere neglects another subtle fact: when movement is condensed, the concept of usefulness becomes just as abstract—and perhaps just as useless—as anything else. This bridge clearly extends from ‘now’ into ‘future’. But what is that ‘future’? If a wildlife overpass leads into a lush nature where no animals pass, and if its destination might be nature or humanity’s future, then this path may not present itself as a straight line but as an entangled form. The ecoduct Lee and Huh witnessed was a crossroads of human and nature, of now and future, of reality and fiction colliding.

If an artwork is also a bridge, it pauses us mid-step with a “Wait — this way?”, inviting us to look at the link between human-nature relations. To treat the ecoduct only as a subject would be a misreading: Lee and Huh’s exhibition treats it as the intersection. If a bridge is a structure to overcome separation, then a crossing yields circumstances beyond easy control. For example, in Lee’s Parametric (2025) works, the polyurethane material inflates — its tube is cast, and as the material begins to harden just five seconds after casting, the artist can no longer fully control its behavior, and the cast form deviates from the original.—and the artist cannot fully control the material’s behavior, and the cast form deviates from the original. In Fraktal (2025), from a distance the piece resembles marble; built with many paint layers and then carved by machine to produce depth, the viewer sees rings of time exposed as spatial depth. It could simply be described as artificial, but traveling toward the future, one might imagine future humanity archaeologically investigating 2025’s humans. Just as we infer ancient life from cave paintings, the strata revealed in Fraktal might lead us to recall the humans of 2025. Then—is the artwork artificial or natural? The gaze that traverses between both will emerge. As one recalls an animal looking at an ecoduct with no animals, future humanity may recall us.

As with the ecoduct, from consequences born of human misunderstanding and indifference, how can we look at the animals we cannot see? This imagination overlaps with the fact that the animals in Survivors of the Wrong Place (2025) were created using AI. Independent of reality, humanity has created nature. Like Rose 2025: On Chronos and Kairos (2025) and Musk Deer—nature becomes a product of human imagination. Though AI may be used for research, as one sees in ubiquitous advertising, human technology satisfies desires and creates others. The scent of musk deer for a perfume is now distributed to the masses. If the process of creating, marketing, and distributing nature by humans is a path, then that process too is cross-directional. A deer living in nature, threatened by extinction; a scent developed artificially and popularised; the road between luxury and massification is not one straight line. Simmel might not have imagined it, but a road—especially a highway—advances in one direction from departure to destination. Along the way obstacles or collisions are removed; yet in truth a path does not only do that. As Simmel said, a path holds the mobility of separation and unity.

If humans and animals stand on a “future-directed” path that might sound abstract, then through artwork we can concretely consider the way ahead. Perhaps This Way, Mr. Goral places us at the crossroads where life and death, human and nature, present and future, fiction and reality meet. It offers the opportunity to depart from anthropocentric thought defined by purpose; like how Lee and Huh accidentally discovered the ecoduct on the road, one can find paths in roads. Because the path holds the mobility of separation and integration, within that dynamism we can redraw the way we walk.


모순을 소진시키지 않는 고고학자의 면면
이은우 《형용모순》

김 현 주
미술평론가, 대한민국

해가 정격 포즈로 하늘을 완전 점령하고 나면
이 발굴지를 덥석 집어 제 식민지를 건설합니다1)

 마치 고고학자처럼 조밀한 운신. 그는 덩어리져 살아내지 않고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2) 이처럼 〈수직, 수평, 그리고 높이〉(2024)에 소임을 다한다. 언뜻 보면 화가인가 싶을 성도 한데 아주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겠지만 조소로부터 출발하긴 했다. 가시적 자취로 〈파묻힌 개〉(2024) 정도가 그 단서다. 

 사실 취향으로는 《형용모순》과 같은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빅 텐트 같이 느껴진 달까. 전시를 보던 당시에는 수사 어구 정도로만 생각하고 둘러봤는데 시간이 지난 후 작품들을 복기해보니 “상반된 개념들의 충돌을 경험하며, 결국 그 갈등과 경계지점에 놓이게 된다”3)는 언급에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당장 전시를 보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게 추상적인 문장으로 구성된 이은우의 노트는 장르로 구별되는 회화, 조각, 사진에 대한 부정과, 조형의 기초인 색에 대한 부정과, 완성이나 의미에 대한 회의와, 생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정과 회의와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전시냐고 한다면 경제적으로 수렴되고 있다고 쉽게 말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그를 발굴지를 제 식민지로 건설하는 고고학자로 상정한다면? 이 가정을 그를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로 둔다. 덧붙여 인터뷰 영상에서 본 시간에 대한 그의 강조가 마치 하나의 점처럼 찍혔다. 그로부터 작고한 시인을 떠올렸는데, 허수경은 시인이자, 독일 뮌스터에서 고대동방고고학을 전공한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사방으로 줄자를 두르고 칼로 잘라낸 듯 땅을 나누고” 다음의 구절을 마저 옮겨 본다.
(기록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기술은 귀여워요. 감쪽같이 당신이 이 지구에 있었던 마지막 자리를 남북경위도 숫자로 딱 매겨내지요, 그리고 제가 지금 기록하고 있는 격자 안에 든 작은 발굴지 지도를 좀 보세요. 그 안에 점을 찍으면 그 점이 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가 됩니다)4)

옛 이를 부르는 발굴이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시간이 굽이지고, 또 미래에 궁금증을 던지는 질문을 통해 점과 점은 연이어져 미처 못한 과업을 미래로 내던진다. 그는, 나는, 우리는 현재의 점이자 과거의 점을 발굴하고 또 미래가 발굴해낼 점일 뿐.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단순하지도 않게 오늘을 살아간다. 이제 그가 찍은 점과, 그가 긋는 선들을 살펴보자. 이은우의 〈미래로부터의 요청〉(2024)은 청주 용암초등학교 3-4학년 12명의 인터뷰 영상이다. 영상은 큰 전시실 한 벽면을 가득 채워 프로젝션 되고 있는데 프로젝션 면만큼 영상이 리플렉션 되는 바닥면까지를 감각한다면 《형용모순》에서 이 작품이 지닌 무게는 제법 무겁다. 이은우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래 사회를 위해서 어른들이 해줘야 할 것은? 그리고 어린이들을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지, 마지막으로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세 개의 질문에 대해 학생들은 각기 답한다. 학생들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답과 또 예상과 미묘하게 갈라지는 답을 하는데 답의 내용보다 종종 침묵의 순간과 인터뷰어를 벗어나는 시선이 차지하는 순간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협업 요청에    2주간에 걸쳐 자발적으로 한 명씩 미술창작스튜디오에 찾아와 카메라 앞에 앉았을 친구들을 생각하면 마냥 귀엽다. 이곳까지 걸어오는 길목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내가, 내 대답이 작품이 된다는 것에 어떤 기대를 품었을까. 그래서 이 친구들은 전시를 보았을까. 소소한 물음이 드는 가운데 영상 형식과 내용에 잠시 가려진 시계 소리를 파헤쳐본다.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는 본디 초침보다 재생 속도를 늦추어 삽입됐다. 영상과 시계 소리가 조응하는 가운데 그의 의도를 짐작해 본다. (미래) 과제를 묻고 답하는 현재 시제는 반드시 선형적 시간의 논리로 과거-현재-미래의 싱크를 맞춰야만 하는가. 아니다. 회복, 아니 고차원적 회복은 형식 논리에 제압될 수 없다. 따라서 〈미래로부터의 요청〉은 어린이들의 순수를 나열한 것에 그치지 않고 논리적 모순이 실재 속에 존재한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 대립을 소진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바닥까지 떨구어진 4개의 조명기구가 설치된 〈빛 아닌 빛〉(2024)도 별도의 지분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기능 아닌 기능으로 공간에 자리했다.

〈미래로부터의 요청〉에 성큼 진입했지만 돌이켜보면 전시장 초입의 〈프랙탈 No.2〉 (2024)는 《형용모순》의 이정표로 기능했다는 사후적 판단에 닿았다. 이 작품은 양갈래로 나뉘는 진입 초입에서 미래와, 시제 상에서 과거-현재로의 두 방향 사이에서 이은우가 잘라낸 땅을 가늠하게 만든다. 〈프랙탈 No.2〉와 〈수직, 수평, 그리고높이〉는 제작 기법상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노동집약적으로 보이는 두 작품은 아크릴과 모델링 페이스트를 사용하여 레이어를 쌓아나가면서도 또 깎아내는, 두 관성을 상호 배반하는 방식으로 결과물이 도출됐다. 제작 공정에 공들인 시간을 묻는건 그에게 공허할 따름이다. 물성이 지층을 이루지만 지층이 그러하듯 결과적인 적층에는 끊임없는 풍화와 침식이 반드시 동반된다. 이에 대한 친절한 지표가 〈수직, 수평, 그리고 높이〉 아래 흩어져있는 깎인 안료다. 외연은 평면이지만 소거법을 따르다 보면 닿는 곳은 회화도 조각도 아닌 무엇이 되고 만다. 이쯤에서 드는 생각은, 그가 단일성으로의 추상을 극도로 기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취하는 논리는 형식 논리가 아닌 양상 논리에 가까워 보인다. 따라서 그로부터 참이자 진실의 필연성을 좇지 않는 대신 모순과 대립을 받아 안으려는 부단한 시도를 찾게 된다. 두 작품 사이에 자리한 〈소리〉(2024)는 피필로티 리스트의 작업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마치 숨구멍처럼 전시를 이완시킨다. 도시에서 채집한 소리를 PVC 배관에 매복시켜 그의 표현대로라면 ‘장난’에 가깝게 구현시켜 놓은 작품으로 영화에서 스팅어(stinger)처럼 발견하는 이들에게만 유효한 보너스트랙이 됐다. 앞서 그를 태도에 있어서 고고학자로 상정했는데 〈뤼데스하임〉과 〈하늘〉은 2019년 제작된 작업을 2024년 복원하여 구현에 있어서도 실제 복원가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팬데믹 시기 활로가 막혔을 때 종종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고 한다.5) 이 두 작품은 사진의 재처리에 가깝게 보이지만 ‘사진’의 재처리보다 사진의 ‘재처리’에 방점이 찍힌다. 필요에 의해 사진이 선택됐지만 그에게는 보이는 세계를 분할해서 이미지 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은 열망이 더 앞섰다. 두 작품은 100장으로 분할되어 있지만 50장이 될 수도, 200장이 될 수도 있다. 100장의 이미지는 좌우상하로 연접해서 뤼데스하임이라는 독일 소도시의 어느 풍경과, 나무와 하늘 풍경을 구상 이미지로 전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표피적 이미지 전달은 작품의 취지가 아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접근법이 작동하는데 사진에서 “RGB 컬러가 쌓이게 되면서 모든 색상이 병치되어 이미지가 형성”된다는 구조와, “우리가 겉으로 보고 있는 이미지를 세부적으로 보게 되면 서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6)이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자세히 보면 화학 제품으로 사진을 녹여 형상이 추상화되고 있는데 추상과 구상의 이분법은 중요하지 않다. 구상과 추상 사이의 넘나듦을 쉽사리 총체화하지 않는 방식은 그를 고고학자의 발굴 태도에 빗대어 말하는 이유다.

에이디 2002년 팔월 새벽 여섯 시 삽으로 정방형으로 땅을 자른다. 비씨 2000년경 토기 파편들, 돼지뼈, 염소뼈가 나오고 진흙으로 만든 개가 나오고 바퀴가 나오고 드디어는 한 모퉁이만 남은 다진 바닥이 나온다 발굴은 중단되고 청소가 시작된다 그 바닥은 얼마나 남았을까,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바닥을 모눈종이에 그려 넣는다 이 미터 곱하기 일 미터의 비씨 2000년경, 사진을 찍고 난 뒤 바닥을 다시 삽으로 판다7) 정방형 땅을 잘라 높이를 재고 방위를 재고 이를 모눈종이에 그려 점을 찍어 마치“당신의 마지막 지상의 자리”8)를, 당신 대신 세계와, 그 세계가 반영된 이미지의 마지막 지상 자리를 현시하는 과업을 그는 묵묵히 해내고 있다.
이은우는 전시 작품들을 거론하며 이것은 사진을 뽑고 지운다, 저것은 쌓고 깎는다 등으로 간단한 듯 설명했지만 개념을 계획적으로 구현해내는 과정에서의 치밀함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는 〈칠하는 사람〉(2024)을 들 수 있겠다. 〈칠하는 사람〉은 14개의 영상 소스를 편집하여 9개의 모니터를 통해 무한 반복하고 있는데 각각의 화면은 화면 내 분할과, 시간순과 역시간순이 재각각이며 또 행위 시점도 다양하게 재생되고 있다. 아마도 한 번에 수행되었을 칠하는 행위를 미분하고 또 적분하는 방법론은 전시 전반의 작품에서도 공유하는 것인데 바로 이 같은 접근법이 내가 그를 덩어리져 살아내지 않고 있다고 말할 근거가 된다. 그에게서 보이는 조밀한 운신은 하나의 큰 덩어리(whole)에 기필코 도달하지 않으려는 각오이지 않을까. “어떤 실재적 대상도 다른 대상과의 대립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소진하지 않으며, 그 대립과는 무관한 자기 자신의 실재성을 갖고 있기 때문”9)이라는 실재적 대립에 대한 정치철학자들의 언명이 《형용모순》에서의 (실재적) 대립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이은우로부터 떠올린다.

1) 허수경, 「새벽 발굴」,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p. 44.
2) 위의 글.
3) 이은우 개인전 《형용모순》(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4) 리플렛에서 발췌한다.
4) 허수경, pp. 44-45.
5) 이은우는 사진을 본격적으로 작업에 적용한 시기를 2014년부터로 상정한다. 사진을 기법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조각가의 입장에서 세상을 이루고 있는 것들을 sculpture와 plastic 사이의 차이로 접근해 보고자 했다고 밝힌다. 2024년 9월 26일 이은우와의 대화에서 발췌한다.
6) 두 가지 작동법은 2024년 9월 26일 이은우와의 대화에서 발췌한다.

7) 허수경, 「시간언덕」,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p. 70.
8) 허수경, p. 45.
9)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샹탈 무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승원 옮김, 후마니타스, 2013, pp.223-224.

부연: 발굴지를 식민지로 건설하는 고고학자의 위치에 그를 두면서도 식민지라는
단어가, 혹은 단어 이상의 실재적 고통을 그에게 전가하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
다. 그러나 이 예속이 나로부터 의미를 발굴하고 구성해내는 (예술의) 잠재적인 가
상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런 상정이 그에게 큰 결례가 아니기를 바란다.


공통의 감성적 표면 위에서 탐사하기

Prof. 한 의 정
미학, 충북대학교, 대한민국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실험하는 이은우 작가가 2024년 《Positive, ,Negative》展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크게 두 종류의 평면 작업으로 나뉜다. 하나는 모델링 재료를 섞은 아크릴 물감으로 색색깔의 층들(layers)을 쌓아 올린 후, 다시 기계와 작가의 손으로 일일이 깎고 파내려가면서 자유로운 형상과 레이어 아래의 색들을 드러내는 색-추상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인화된 풍경과 인물 사진 위에 용해제를 뿌려 사진의 입자(pigment)를 녹여 번지게 하여 상(像,image)을 흐릿하게 만드는 구상에 가까운 작업이다. 일견 쌓고 깎기 vs. 녹이기, 추상 vs. 구상, 회화 vs. 사진, 드러내기 vs. 지우기 등 전혀 다른 종류와 스타일로 보이는 두 작업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질문을 던져 본다.

공통의 감성적(aesthetic) 표면
일단 두 작업 모두 평면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조소를 전공하고 입체, 설치, 미디어 작업을 주로 선보인 작가가 평면으로 회귀했다거나 평면도 잘 다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는 쌓고 깎는 작업을 일종의 부조(relief), 즉 평면 상에 모델링하는 작업으로 보고 “사진으로 조각하기”와 같은 표현을 종종 쓰는 등, 평면도 입체로 파악하는 습관이 체득되어 있는 듯했다. 요즘 같은 다매체 시대에 조소 작가가 평면 작업을 선보이는 것이 어색하거나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필자는 이은우 작가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은우 작가의 주된 탐구의 영역이 ‘표면(surfac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표면이란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가 말한 평평한 캔버스 표면과 같은 뜻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말한 “기호, 형태, 행위가 동등해지는 어떤 공통의 감성적인 표면”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랑시에르는 이 공통의 감성적 표면의 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더는 회화를 모방하지 않으며, 회화는 더는 시를 모방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에는 말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형태들이 있다는 뜻이 아니다. (…) 즉 말의 예술과 형태들의 예술, 시간의 예술들과 공간의 예술들을 분리하면서 각각의 예술의 장소와 수단을 나누었던 원칙이 폐지되었다는 것, 분리된 모방의 영역들을 대신해 공통의 표면이 구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14, 190쪽)

전환(conversion)의 표면
이은우는 굳이 회화, 사진, 조각으로 나눌 수 없는, 아니 나눌 필요가 없는 공통의 감성적 표면에서 작업한다. 이 공통의 표면에는 회화, 사진, 조각의 기법들을 모두 적용할 수 있고, 우리가 보고 있다고 여기는 ‘시각요소들(visual elements)’과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들(형상들)’이 서로 침투하고 뒤섞이는 장소이다. 그래서 이 표면에서는 기존의 역할과 기능이
뒤바뀌는 일이 흔하다. 예를 들어 표면색(surface color)은 일반적으로 사물의 표면에서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에 인식되는 색인데, 이은우의 작품에서는 사물의 깊숙한 곳에 표면을 투과한 다양한 색들의 층들이 존재함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대지>(2021), <노을>(2021), <파랑>(2021), <아인 클랑_하모니>(2021) 등). 멀리서 보면 화면의 표면색이 노을의 색으로 지각되지만, 고고학 유적을 탐사하듯 지층을 파내려가면 각각의 층들에 묻혀있던 형상과 색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지우기 기법도 기존과 다른 기능을 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t Richter)가 자신의 사진회화에 블러(blur) 효과를 줌으로써 그 이미지가 가진 외상적 실재(the traumatic Real)를 지우고 숨기려 했다면, 이은우 사진의 용해 기법은 오히려 카
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대상의 실재나 실제 경험의 사실적 인상을 담아내기 위함이다(<로마식 개선문이 있는 풍경>(2015), <크리스티나 베르거>(2016), <울타리와 꽃>(2017), <정원>(2020)등). 이와 같이 이은우 작업이 기반하고 있는 공통의 감성적 표면에는 실재/가상, 형상/배경, 과거/현재 중 그 어느 것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기능들의 전환과이동이 자율적으로 일어난다.

공존(coexistence)의 표면
이은우의 입체와 미디어 작업에서도 표면의 탐구는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파인애플의 표면을 폴리우레탄 폼으로 다양하게 본떠서 하나의 기둥으로 만들어 낸 <무제>(2018)나 카메라와 삼각대, 그리고 여타 사물들이 시멘트 표면으로 뒤덮여 하나의 덩어리 오브제가 되어버린 <당신은 버튼을 누른다>(2017)는 그 어느 것에도 스며들 수 있고 어떤 것도 감싸안을 수 있는 유동적인 표면의 실험이다. 세대 간의 경계, 감시와 소통, 개인과 사회, 자연과 인공의 만남을 주로 다루는 이은우의 미디어 프로젝트 작업 또한 서로 다른 개체와 존재가 예술이라는 ‘공통장(commons)’에서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들로 보인다(<한쪽으로>(2015), <타버리다II>(2017), <프로젝트 시놉티콘>(2020), <산은 많고 들은 적으며, 사람들의 성품은 부드럽고 삼간다>(2022) 등).

조우(encounter)의 표면
또한 이은우가 시도하는 공존의 표면은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는 표면이기도 하다. 작가는 여러 기법과 재료를 가지고 형식(form)을 실험하는 과정 중에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형상(Form)을 만난다고 밝혔다. 물감의 레이어 층을 빠르게 깎아내는 CNC머신과, 기계의 날을 만들고 기계의 작동 방향과 기계가 그릴 모양을 결정하는 작가가 공동 작업을 해나가는 어느 순간, 그 형상은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기계의 결과물을 일일이 사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해 작가의 손으로 만지고 다듬는 과정 중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카메라의 눈이 자동적으로 담은 형상과 색을 작가가 용해제를 사용해 적절히 녹이는 중에도, 또는 용해 과정 위에 다시 사포, 붓, 손으로 문질러 지워나가는 과정 중에도, 매번 예기치 않은 만남이 형성된다. 이 형상과의 조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나는 자리이며, 은폐되어 있던 것들이 표면을 뚫고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작가에게도, 그리고 이은우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도 그 순간들은 예기치 못한 경험(l’inattendu)이기에 우리 일상과 구별되는 미학적(aesthetic) 경험인 것이다. 이 경험들을 각자 쌓아놓을 수 있도록, 그리고 시간이 지나 언제든 다시 열어볼 수 있도록 이은우는 이번 전시에서 쉼표 사이 공간을 넉넉히 비워놓았다.


 ….Alltagsgegenstände addiert und dadurch auf ästhetische, artifizielle Ebene gebracht, Materialästhetik spricht hier in Reinkultur, eine Bildwirkung, die am stärksten eine Erwartungshaltung in Richtung einlöst … ein kontemplativ-philosophisches Objekt, das in
rigider Eigenständigkeit  zur Ruhe und Sammlung, zum zu- sich-selbst-Kommen einlädt…

Dr. Otto Martin vom Kunstverein Eisenturm, Dezember  2013


Eunu Lee wählt verschiedene Objekte, Fundstücke, welche durch den Blick des
Betrachters und durch die Zusammenführung nicht mehr als einzelne, dreidimensionale
Objekte, sondern zu einem Ganzen aus zweidimensionalen Farbflächen und abstrakten
Formen werden. Auch die Freiheit des Blicks des Individuums tritt in den Vordergrund.

Lara Hoffmann (Kunstgeschichte), July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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